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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업적

학습플래너 이선생 2019. 12. 18. 10:19

최근 천문이라는 영화가 개봉하고

세종대왕에 대한 관심이 다시한번

몰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성군인 세종대왕의 업적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책을 읽어대던 호학의 군주입니다.

세종의 독서는 유학의 경전에 그치지 않고

역사, 법학, 천문, 음악, 의학 등 다방면에서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쌓았다고 합니다.

 

본인 스스로 경서는 모두 100번씩 읽었고,

딱 한 가지의 책만 30번을 읽었으며, 경서 외에

역사서와 기타 다른 책들도 꼭 30번씩 읽었다고 합니다.

 

1422년 태종이 죽고 재위 4년 만에 전권을 행사하게 된 세종은

태종이 만들어놓은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태종이 잡아놓은 국가의 골격을 완성해나가고 선현의 지혜를 신뢰했던

세종은 우선 유학의 경전과 사서를 뒤져 이상적인 제도를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골격만 갖춰진 제도를 세세한 부분까지 규정했습니다.

 

작은 법규하나를 제정할 때에도 그 제도에 대한 역사를 쭉 고찰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분석하며, 보완하는 방안, 다른 제도의 관련성 현상황을

고려하여 정하였습니다.

세종은 조선시대 왕 가운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위대한 성군일 수 있었던 것은 능력 때문만이 아니에요.

세종은 백성을 사랑한 어진 왕이었습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을 베풀었고 사면령을 빈번히 내렸으며,

징발된 군사들은 늘 기한 전에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노비의 처우를 개선해주기도 하였는데 장영실을 예로 들어볼 수 있겠네요.

훈민정음의 창제도 이러한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실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서 전하는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해요.

세종 최대의 업적이면서 우리역사에가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만들었는지, 구체적인 동기가 무엇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다고 해요.

 

심지어 세종 단독 작품인지 집현전 학자들과의 공동 작업인지에 대해서도

아직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엄청난 반대를 예상한 세종이 비밀리에 작업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의견이 가장 강력한 연구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초인적인 연구를 하다보니 세종은 일찍부터 육체의

한계를 느껴야했습니다. 30대 초반부터 풍질이 발병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으며,

40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하루 종일 앉아서 정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나빠졌다고 해요.

 

집권 후반기에 세종은 태종이 마련한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인 육조 직계제를

의정부 서사제로 개편하고 세자에게 서무를 결재토록 하고 왕에게 집중되었던

국사를 분산시켰습니다.

 

건강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많은 유학자들로 인해

자신의 유교적 이상을 실현시켜줄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햇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면서도 새로 편찬된 책들을

수십 권식 직접 검토하던 세종은 1450년 2월 54세 세상을 떠났습니다.